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2세 (문단 편집) == 업적 == ||<-4><:> [[파일:1154.png|width=100%]]|| ||<-4><:> 헨리 2세가 프랑스 내에서 소유했던 영토 || '''그는 결혼과 군사, 두 가지를 통해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헨리 2세는 19세에 결혼을 하게 되는데 아내는 자신보다 10세 연상이였던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전처 [[엘레오노르 다키텐|아키텐의 엘레오노르]]였다.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왕비였던 시절부터 남편과의 불화와[* 둘 사이에 아들이 없었던 이유도 컸다.] 고향 아키텐과 프랑스의 정치적 갈등 등으로 루이 7세와의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렀다. 엘레오노르와 루이 7세는 [[교황]]에게 청해서 '''혼인무효'''[* (오늘날까지도)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몇 가지 경우에는 '혼인무효'가 가능하다. 자세한 것은 [[혼인성사]] 참조.] 판결을 받았다. 웃긴 건 엘레오노르와 루이 7세는 10촌[* [[중세]] [[교회법]]상 친가와 외가 기준으로 12촌이면 [[근친상간]]이라고 하여 '혼인무효' 사안에 해당했다. 엘레오노르와 루이 7세의 혼인은 무효로 처리됐지만,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딸 둘은 적녀로 인정하는 정치적 배려도 있었다.]이라 [[근친상간]]이라는 이유로 '혼인무효'가 되었는데, 몇 달 후에 결혼한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는 이보다 더 가까운 8촌 지간이었다.[* [[유럽]] 왕실 사이에서 [[근친혼]]은 흔했다. [[교황청]]에서 '''[[기독교]] 군주 사이의 결합'''이라는 대의를 인정하여 관면했기 때문에 결혼 자체는 별 문제 없었지만, 이후 정치적이라든지 여러 가지 이유로 [[이혼]]해달라며 들이대는 대부분의 혼인무효 사유도 이 근친혼이었다. 예를 들면 슬하에 자식이 없는 이유가 친척과 결혼해 근친상간을 저질렀기 때문이니 혼인무효화해달라든지.] 이미 결혼 전부터 정부가 있었고, 결혼 후에도 늙은 처에 만족하지 못하며 대놓고 바람을 피워서[* 그만큼 사생아도 많았다.] 왕비와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와의 사이에서 5남 3녀를 두었는데, 그중 왕이 된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 [[존 왕]]이 유명했다.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왕보다 영지가 넓다는 아키텐 공작의 상속녀였는데, 헨리 2세와 재혼하면서 푸아티에, 아키텐 지방이 잉글랜드 국왕에게로 넘어왔다. 여기에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노르망디, 앙주, 잉글랜드 지방까지 합치니 잉글랜드 + 프랑스 서쪽 절반에 달하는 거대한 영토의 군주가 되었다.[* 브르타뉴 제외] 그리고 엘레오노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유럽 왕가와 혼인관계를 맺어 시칠리아, 독일, 카스티야의 영지를 획득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말콤 1세를 조져서 충성 서약을 받아내고 [[노섬벌랜드]] 등의 영토를 되찾았다. 그는 내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유능한 재판관 [[토마스 베켓]](Thomas Becket)을 등용해 행정과 사법 제도를 정비해 [[봉건제|봉건]] 군주국에서 [[관료제|관료]] 군주국으로 잉글랜드를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충신]]이었던 토마스 베켓은 헨리 2세가 주선해 [[캔터베리 대주교|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자 그와 대립했다. 이 시기는 [[잉글랜드 왕국]] 내 교회의 영향력을 두고 왕권과 교황권이 격렬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는데, 내 편 해달라고 기껏 임명한 놈이 뒤통수를 거하게 때려버린 셈이니... "헨리 2세가 얼마나 베켓을 싫어했냐?"면, 당시 교황이었던 [[알렉산데르 2세]]에게 베켓을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에서 해임하라고 협박하는 편지에서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이슬람]]으로 개종하겠다."'''라고 협박할 정도였다.[* 이것이 얼마나 파격적인 일이었냐면, 중세 유럽에서 기독교의 위치가 절대적이었다는 점은 제쳐두고서라도, 당시는 [[십자군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순간 곧바로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뜻이었다. 헨리 2세도 이를 강조하기 위해 편지에서 "[[누레딘]]의 잘못된 사상을 받아들여 [[이단]]이 되겠다."라고 표현했다. 심지어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군주였던 [[아모리 1세]]가 바로 그의 삼촌이었다. 헨리 2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었고, 그가 대뜸 자신이 다스리는 모든 영토에서 이슬람을 유일한 국교로 선포한다고 하면 유럽을 얼마든지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었다.][* 헨리 2세는 여러 명의 개인 교사로부터 지도를 받았는데, 그중에는 [[아랍]]학자이자 [[언어학자]], [[자연철학자]]였던 [[바스]]의 아델라드(Adelard of Bath)도 있었다. 그를 통해서 헨리 2세는 아랍의 문화를 배웠고, 아랍의 선진 학문을 경외했다. 이슬람에 대해서도 이단이라 분명히 선을 그었지만, 여러 이단 중에서는 제일 그럴싸하다고 평가했다.][* 사실 헨리 2세는 이전에도 교황을 협박한 전과가 있다. 당시 5살밖에 안 된 자기 아들과 [[루이 7세]]의 갓난아기 딸 마가렛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그러지 않을 경우 [[대립교황]]인 빅토르 4세를 지지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는 마가렛의 [[지참금]]인 벡생(Vexin) 땅을 앋기 위함이었는데, 당시에는 이 협박이 통했기에 헨리 2세는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통할 줄 알았다.][* 다만 헨리 2세가 실제로 이슬람으로 개종할 확률은 0%에 수렴했다. 이미 기독교가 뿌리깊게 자리잡은 서유럽에서 하루아침에 전부 이슬람으로 개종하라고 하면 백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임은 당연했고, 개종하는 즉시 유럽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되었다. 무엇보다 헨리 2세 본인부터가 이슬람을 좋게 봐야 이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황은 그의 협박에 굴하지 않았고, 끝까지 헨리 2세와 베켓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불화가 커져서 헨리 2세는 베켓과 크게 다투고는 >'''"저 말썽쟁이 성직자를 내게서 없애줄 이는 없단 말인가?"''' 라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발언[* [[높으신 분]]이 넌지시 하는 말이나 [[완곡어법]]도 "부하들은 명령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자주 인용된다. 2017년, 전 [[FBI]] 국장 [[제임스 코미]]가 "자신이 [[도널드 트럼프|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수사 중단 압력을 받았다."며 이 구절을 인용해 또 화제가 됐다. 원문: "Will no one rid me of this meddlesome(turbulent) priest?" 이걸 뜻하기 위해 부활한 말이 [[손타쿠]].]을 했고, 그 말을 들은 부하 넷이 즉시 대성당으로 가서 안에 매복해 있다가 베켓이 나타나자 토마스 베켓을 쳐죽였다. 하지만 헨리 2세는 그의 부하들이 베켓을 죽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는데, 베켓이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당황했고, [[교황청]]에서 [[토마스 베켓]]을 [[성인(기독교)|성인]]으로 [[시성]]해버리는 바람에 큰 낭패를 보고 말았다.[* 여담이지만 이 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캔터베리 대성당은 [[제프리 초서]]가 쓴《[[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에서 주인공 일행의 목적지가 된다.][* 다른 여담으로 베켓이 '''죽은 지 361년 후'''인 1531년, 당시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 8세]]는 토마스 베켓을 반역죄로 기소하고, "30일 안에 법원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연히 베켓은 법원에 출두하지 않았다. 법원은 [[궐석재판]]에서 베켓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캔터베리 대성당]]에 있었던 베켓의 무덤을 부수어 유해를 불태운 후 순례객들이 두고 간 보물들을 몰수했다.][* 또 다른 여담으로《[[퇴마록]]》에서 [[박신부]]가 사용하는 '베케트의 [[십자가]]'의 베케트가 바로 이 토마스 베켓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